해방 이후 역사교육의 변천1(교수요목기~제2차)
1. 해방~교수요목기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서 벗어나 새로이 민족교육을 시행할 기회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일제말 국어와 국사교육이 전면적으로 폐지됨에 따라 해방 직후 우리 역사를 가르칠만한 교재가 전혀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서둘러서 국어와 국사교재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1945년 12월 국민학교용 교재가 만들어졌으며, 이듬해 5월에는 진단학회에 의해 중등학교용 국사 교재인 「국사교본」이 발간되었다. 「국사교본」은 해방 직후 발간된 최초의 역사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급히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변화 위주로 쓰여진 내용이 빈약한 교재였다. 삽화나 그 밖의 학습자료는 전혀 실려있지 않았으며, 우리 역사의 근대적 변화모습은 별로 서술되지 않았다. 민족의 입장에서 역사서술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화나 당쟁을 강조하고 역사변화에서 외국의 영향을 중시하는 등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과 1947년에 걸쳐 국민학교와 중학교 교수요목을 제정하여, 교육제도를 정비하였다. 사회생활과는 일제말의 국민과를 대체한 것으로, 역사와 지리, 공민이 여기에 편제되었다.
역사는 국민학교 5, 6학년 때 초보적인 국사의 통사를 배우기 시작하여 중학교 1학년 때는 '이웃나라의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동양사를, 2학년 때는 '먼나라의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사를, 3학년 때는 '우리나라의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국사를 배우도록 편제되었다. 중학교 4학년 때는 '인류문화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계사를 배우고, 5학년 때는 '우리문화사'라는 이름으로 국사를 배우게 하였다.
이 시기 국사교과서들은 대체로 왕조사 중심의 통사적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민족적 자긍심의 회복과 자주적 민족의식이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고대사를 중시하였으며, 외침을 극복한 민족 역량을 강조하였다.
2. 제1차 교육과정
중학교의 역사는 교수요목기와 마찬가지로 사회생활과의 한 과목이었다. 하지만 종전과는 달리 1학년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국사를 먼저 배우고, 2, 3학년에서 '세계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동서양사를 통합한 세계사를 배우게 하였다. 고등학교에서는 '사회생활과'를 '사회과'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역사 과목은 2학년이나 3학년, 또는 2, 3학년에 걸쳐서 국사와 세계사를 학습하도록 편제되었다. 이 중 국사는 필수과목이었으나, 세계사는 선택과목으로 바뀜에 따라 세계사 교육이 약화되었다.
제1차 교육과정 당시 역사교과서는 검정본 교과서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국사의 경우 교과서들 사이에 용어나 학설상의 차이가 여러 군데 나타나서 일선 학교나 학생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다.
3. 제2차 교육과정 시기
교육과정의 개정 방향에는 1960년 4월 혁명과 1961년의 5.16쿠데타 이후 전개된 정치 사회상황에 합리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도 작용하였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1963년 2월 공포된 제2차 교육과정이었다.
'사회생활과'는 중학교에서도 이름이 '사회과'로 바뀌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국사는 공통필수, 세계사는 선택필수 과목으로 사실상 모든 학생들이 국사와 세계사를 배웠다. 제2차 교육과정부터 고등학교의 수업시수로는 단위수가 사용되었는데, 이 때 역사과목의 단위수는 국사 6단위, 세계사 6단위로 사회과목 중에서 가장 높았다.
이 시기 역사교육의 내용에도 당시 정부의 이념과 정책이 반영되었다. 애국애족과 반공민주국가, 국제협조, 민족정신과 민족문화, 경제발전 등이 사회과나 역사교육의 목표로 내세워졌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책임과 의무, 민족적 자각과 단합, 협동적 공동의식이 강조되었다.
이 시기 국사교육은 제1차 교육과정 당시 교과서마다 달라서 문제가 되었던 용어와 학설상의 차이를 통일하였으며, 근현대사의 비중을 이전보다 높이고, 해방 이후 이루어진 한국사의 연구성과들이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제2차 교육과정 역사과목의 내용구성에서 두드러진 점은 역사를 비교사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 편성은 폭넓은 역사 성찰을 통해 역사의식과 역사적 판단 능력의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단순한 연대사적 방법으로 세계사를 우리나라 역사의 전개순에 맞추어 배열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역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박정희정권의 3선개헌에 대한 반발,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로 인한 남북관계의 약화, 미국 일본과 공산 중국의 관계개선 움직임 등으로 사회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당시 정부는 반공과 경제개발을 구호로 모든 비판과 반발을 억누르고자 하였다. 국적있는 교육을 제창하여 1968년 12월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였다. 1969년에 행해진 교육과정의 부분개정은 이러한 교육시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의 경우 각 부분의 역사적 체계를 강화한다는 취지 아래 중학교 사회Ⅱ에서 국사와 세계사를 같은 단원에 서술하였던 것을 분리하였다. 한편 1960년대 이루어진 한국사 연구성과들을 반영하였다. 하지만 현대사 부분에서는 정부의 구체적인 시책을 교과서 서술에 포함시킴으로써 국사교과서가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당시 정부는 민족적 주체성을 내세우면서 국사교육의 강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72년 국사교육강화위원회가 구성되어, 국사교육의 강화 방안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서 벗어나 새로이 민족교육을 시행할 기회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일제말 국어와 국사교육이 전면적으로 폐지됨에 따라 해방 직후 우리 역사를 가르칠만한 교재가 전혀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서둘러서 국어와 국사교재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1945년 12월 국민학교용 교재가 만들어졌으며, 이듬해 5월에는 진단학회에 의해 중등학교용 국사 교재인 「국사교본」이 발간되었다. 「국사교본」은 해방 직후 발간된 최초의 역사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급히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변화 위주로 쓰여진 내용이 빈약한 교재였다. 삽화나 그 밖의 학습자료는 전혀 실려있지 않았으며, 우리 역사의 근대적 변화모습은 별로 서술되지 않았다. 민족의 입장에서 역사서술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화나 당쟁을 강조하고 역사변화에서 외국의 영향을 중시하는 등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과 1947년에 걸쳐 국민학교와 중학교 교수요목을 제정하여, 교육제도를 정비하였다. 사회생활과는 일제말의 국민과를 대체한 것으로, 역사와 지리, 공민이 여기에 편제되었다.
역사는 국민학교 5, 6학년 때 초보적인 국사의 통사를 배우기 시작하여 중학교 1학년 때는 '이웃나라의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동양사를, 2학년 때는 '먼나라의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사를, 3학년 때는 '우리나라의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국사를 배우도록 편제되었다. 중학교 4학년 때는 '인류문화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계사를 배우고, 5학년 때는 '우리문화사'라는 이름으로 국사를 배우게 하였다.
이 시기 국사교과서들은 대체로 왕조사 중심의 통사적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민족적 자긍심의 회복과 자주적 민족의식이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고대사를 중시하였으며, 외침을 극복한 민족 역량을 강조하였다.
2. 제1차 교육과정
중학교의 역사는 교수요목기와 마찬가지로 사회생활과의 한 과목이었다. 하지만 종전과는 달리 1학년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국사를 먼저 배우고, 2, 3학년에서 '세계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동서양사를 통합한 세계사를 배우게 하였다. 고등학교에서는 '사회생활과'를 '사회과'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역사 과목은 2학년이나 3학년, 또는 2, 3학년에 걸쳐서 국사와 세계사를 학습하도록 편제되었다. 이 중 국사는 필수과목이었으나, 세계사는 선택과목으로 바뀜에 따라 세계사 교육이 약화되었다.
제1차 교육과정 당시 역사교과서는 검정본 교과서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국사의 경우 교과서들 사이에 용어나 학설상의 차이가 여러 군데 나타나서 일선 학교나 학생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다.
3. 제2차 교육과정 시기
교육과정의 개정 방향에는 1960년 4월 혁명과 1961년의 5.16쿠데타 이후 전개된 정치 사회상황에 합리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도 작용하였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1963년 2월 공포된 제2차 교육과정이었다.
'사회생활과'는 중학교에서도 이름이 '사회과'로 바뀌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국사는 공통필수, 세계사는 선택필수 과목으로 사실상 모든 학생들이 국사와 세계사를 배웠다. 제2차 교육과정부터 고등학교의 수업시수로는 단위수가 사용되었는데, 이 때 역사과목의 단위수는 국사 6단위, 세계사 6단위로 사회과목 중에서 가장 높았다.
이 시기 역사교육의 내용에도 당시 정부의 이념과 정책이 반영되었다. 애국애족과 반공민주국가, 국제협조, 민족정신과 민족문화, 경제발전 등이 사회과나 역사교육의 목표로 내세워졌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책임과 의무, 민족적 자각과 단합, 협동적 공동의식이 강조되었다.
이 시기 국사교육은 제1차 교육과정 당시 교과서마다 달라서 문제가 되었던 용어와 학설상의 차이를 통일하였으며, 근현대사의 비중을 이전보다 높이고, 해방 이후 이루어진 한국사의 연구성과들이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제2차 교육과정 역사과목의 내용구성에서 두드러진 점은 역사를 비교사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 편성은 폭넓은 역사 성찰을 통해 역사의식과 역사적 판단 능력의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단순한 연대사적 방법으로 세계사를 우리나라 역사의 전개순에 맞추어 배열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역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박정희정권의 3선개헌에 대한 반발,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로 인한 남북관계의 약화, 미국 일본과 공산 중국의 관계개선 움직임 등으로 사회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당시 정부는 반공과 경제개발을 구호로 모든 비판과 반발을 억누르고자 하였다. 국적있는 교육을 제창하여 1968년 12월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였다. 1969년에 행해진 교육과정의 부분개정은 이러한 교육시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의 경우 각 부분의 역사적 체계를 강화한다는 취지 아래 중학교 사회Ⅱ에서 국사와 세계사를 같은 단원에 서술하였던 것을 분리하였다. 한편 1960년대 이루어진 한국사 연구성과들을 반영하였다. 하지만 현대사 부분에서는 정부의 구체적인 시책을 교과서 서술에 포함시킴으로써 국사교과서가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당시 정부는 민족적 주체성을 내세우면서 국사교육의 강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72년 국사교육강화위원회가 구성되어, 국사교육의 강화 방안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댓글
댓글 쓰기